2월의 겨울, 건조한 공기가 빛에 반사되어 피부에 맞닿을 때 생기는 하얀 빛이 딱 그 빛이다. 멀리서 봐도 발광해 공간 전체로 퍼져 나오는 뭉뚝한 빛이 익숙해 보인다. 마치 빛은 없지만 빛을 알아차릴 수 있는 시간. 계단을 하나 둘 오르며 마주하게 되는 방 안에서 피어나는 몽롱한 빛의 흐름을 따라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건축적인 요소에 놓인 형광등 빛의 흐름이 공간을 채우고 관람자에게 즉각적 체험이라는 신체 경험을 유도함으로 어떠한 상황 자체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맞다, 익숙한 그 빛이다.
뉴욕 어퍼 이스트 사이드(Upper East Side) 69가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David Zwirner Gallery)에서 댄 플래빈(Dan Flavin)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소위 고풍스럽고 호화로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동네 특성과는 조금은 괴리감이 있었던 미니멀한 그의 초기 설치 작품들이 벽에 기대어 있다. 갤러리 내부에 정교한 몰딩과 목공예, 벽난로 같은 독창적인 건축 디테일이 형광등의 조명을 받아 모든 공간에 오묘한 매력을 가져다 준다. 커다란 창문 사이에 억지로 자연광을 막아버리고, 완전한 인공 빛이 공간을 채운다. 1967년에 제작된 이번 전시 작품들은 Kornblee Gallery(1967)에서 선보인 작품으로 총 6개의 세로 수직 방향의 작품들이다. 주로 모서리, 문틀 옆, 아래, 위쪽에 자리 잡고있으며 벽난로는 약간의 침입자 같은 역할을 한다. 양쪽의 전시장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마주 보고 있다. 하나의 공간에는 하얀 형광등 조명이 하나의 완전한 독립적 사물로 존재하며 관람자가 어떻게 자각하고 있는지 조용한 정적만 흐를 뿐이다. 작가 내면의 존재하는 주관성은 완전히 배제되었고 관람자의 지각적 시간성만 강조된다. 형광등으로 가벼운 구상과 스케치를 통해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단일성을 강조한다. 단일 색상의 배열로만 공간을 뚜렷하게 나누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방 전체, 복도를 통째로 사용하는데 이는 그의 건축에 대한 집착을 증명한다. 어쩌면 지루하다 싶을 정도의 일률적인 반복성,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반복성의 구조로 벽의 모서리, 문 옆, 거울의 반대편, 관람자가 위치를 이동하며 관람해도 같아 보이는 방식은 무엇을 의미할까? 순수한 독립적 작품으로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건축에서의 미적 성취를 위한 것일까?
반대쪽 공간은 똑같이 6개의 대각선으로 구성된 하나의 작품, 결국 데칼코마니처럼 반복되는 총 3세트가 극적으로 공간을 초록빛으로 물들인다. 1967년 10월 콘블리 갤러리에서 선보인 작품을 그대로 재현한다. 녹색 형광등은 대각선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까지 보여지는 벽에 3개를 붙여 연속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나름의 법칙을 세웠다. 플래빈은 초록빛의 강도가 지각 변화를 일으키도록 이 작업을 고안했다. 작품을 한바퀴 돌고 바라보는 반대편 방의 흰색 광원이 분홍색으로 보이게 하는 의도적인 현상학적 효과를 만들었다. 설치작품에 들어가있는 관람자는 또 다른 세상의 경험을 하게 하는 “뚜렷한 순간”을 만난다. 형광등의 빛 자체가 공간의 부피감을 더하고 형광등이 발산하는 빛의 색은 공간으로 회화를 확장시킨다. 결국 그 뚜렷한 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결코 쉽지 않은 배열과 공간의 맥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똑같은 색과 모양을 띤 형광등이 공간과 장소에 따라 작품성이 결정된다. 근데 그건 개인차가 크다. 분명 오브제 에 지배당하고 싶지 않아 작품과 관계하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도 방법이다. 미니멀리즘이 한물갔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미니멀리즘이 등장하면서 당신의 눈을 편안하게 해줬고, 그냥 전시장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다니게 마음의 짐을 덜어주지는 않았는지. 특정 맥락 속에서 작은 형광등을 넣어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런 건물이라는 실증적 항들과 교섭하고 풍경과 건물이 하나 된 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니 익숙하지 않은 19세기 유럽풍 건축물의 웅장함 때문에 여전히 갤러리는 낯설지만 정갈하고 깔끔하게 벽에 붙은 형광등 오브제가 마음을 안심시킨다. 오브제가 일렬로 정리된 느낌이 오히려 안정감이 들었다.
형광등의 다양한 사용 범위, 디자인적인 정갈함, 각각 공간에서 주변 환경과 갖는 성격에 의해 달라지는 의미들. 똑같은 풍경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은 더 멀리 보려고 하고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일지도 모르지. 의미가 될 또 다른 시작점을 찾고 있는 것이겠지. 결국 바깥이 아닌 내부에 들어서야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그건 규칙과 수의 배열로도 찾을 수 없는 그래서 직접 마주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해는 나의 몫이고 나는 댄 플래빈이 선사한 예술의 단편적인 의미가 어딘가에 떠돌아다닌다는 것을 기꺼이 즐긴다.
‘간단하고 간결하다는 것은 사람을 가리지 않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저절로 알 수 있으니까 말이야. 건축에서 사소한 장치를 생각할 때도
사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그 장치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상적인 거야.
취급 설명서 따위 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우위라고.’
_<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Masashi Matsu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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